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고려 말 왜구의 침입 (문단 편집) === 1373년, 삼일포 전투 === [[파일:3L4aMhP.jpg|align=right]] 이 해 공민왕은 왜구를 막기 위해 [[양백연]](楊伯淵)을 서북면 도순찰사(都巡察使)로, [[이성림]](李成林)을 서해도 도순찰사(都巡察使)로 임명했다. 2월에는 정말 간만에 고려군의 입장에선 시원한 승전 소식이 들려왔다. 왜구가 구산현(龜山縣)의 삼일포(三日浦)로 대거 몰려오자, 경상도 도순문사(都巡問使)였던 [[홍사우]](洪師禹)가 군사를 끌고 가서 '''왜구를 대파한 것이다.''' 이후 왜구는 산으로 도주했는데, 홍사우는 이를 추격하여 [[사면초가|사면으로 포위하여 적을 압박하고]] 밀어붙여 '''2백이나 되는 왜구의 목을 베었고, 물에 빠져 죽은 왜구가 무려 1,000명이 넘었으며, 노획한 무기가 셀 수조차 없었다.''' 희대의 졸전만을 거듭하던 당시 고려군으로서는 상당한 대승을 거둔 것. 홍사우는 본래부터 청렴하고 강직하여 사람들의 신망을 얻었다고 한다. 다만 이 이야기에는 안타까운 뒷이야기가 있는데, 홍사우의 아들이 바로 '''그 유명한 [[홍륜]]'''이었던 것. 삼일포에서 홍사우가 대승을 거둔 '''바로 그 다음 해,''' 홍륜은 공민왕 시해 사건에 연루되었고 당연히 홍씨 집안 역시 반역자의 집안이 되어 초토화되었다. 사건이 터졌을 때 전라도에서 도순무사로 있던 홍사우는 그대로 잡혀 아들 홍이(洪彛)와 함께 유배된 후 처형되었다. 애시당초 홍사우는 홍륜의 행동들이 질이 안 좋아 공민왕에게 '''"홍륜은 인간의 탈을 쓴 짐승이니 궁중에 두지 마시라."'''며 부정적인 입장을 보였고 '''심지어 홍륜을 죽이려고도 생각했으나''' 결국 일이 이렇게 되어 버렸다. 부자가 처형될 때 홍이는 '''"아버지는 나이가 많으니 나를 죽이고 아버지를 살려 달라."'''고 울부짖었고 홍사우는 '''"나는 늙었으니 나를 죽이고 제발 우리 아들만은 살려 달라."'''고 울었다. 그리고 처형 직전까지 아들을 부둥켜안고 눈물을 쏟으며 '''"내가 그렇게 왜구를 많이 죽였건만, 이제 그 공들은 다 어디에 있단 말이냐?"'''고 소리쳤다. 부자가 그렇게 죽었을 때 모든 사람들이 안타까워했으며, 전라도와 경상도 사람들 중에서는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도 있었다고 한다. 홍사우의 대승이 있던 2월이 지나고 3월 경 왜구는 하동군을 공격했다. 4월 경 왜구가 개경 근처의 섬까지 다가오자 조정에서는 평리(評理) [[유연]](柳淵)을 동강으로 보내 이를 수비하게 했다. 왜구는 이 때문인지 두어달 정도 가만히 눈치만 보고 있었지만, 6월에는 갑자기 동강과 서강으로 공격을 와 '''한양부까지 침입 해''' 민가를 초토화 시키자 인근 수백여리가 두려움에 떨었다. 이 무렵 [[명나라]]에서 사신으로 온 환관 손내시(孫內侍)가 난데없이 자살하는 사건이 있었는데, 이에 홍무제는 "내가 조사해보니까 자살했다는 건 구라고 너희들이 폭행하고 독살했다면서? 그 환관은 사실 나랑 10년 넘게 알고 지내던 사이였다." 라면서 '''"내가 너희들을 칠 생각은 전혀 없지만, 자꾸 나댄다면 5년 내에는 장담 못해도 10년 내로 아작을 내버리겠다."''' 는 발언을 했다. 이때의 말에 왜구 문제가 또 언급되어 있다. >"왜구들이 항상 너희들을 괴롭히고 있으니 너희들은 응당 3백 혹은 5백 척의 배를 준비해 군인들로 하여금 왜구를 잡게 한다면 그것이 가장 좋은 방책이 될 것이다. 여기는 그 곳과 바다를 사이에 두고 서로 떨어져 있으나 왜구들이 침구했을 때 우리는 군사를 보내 그들을 물리쳤다. 왜구를 잡지 못하였기 때문에 우리는 명주위(明州衛)의 대지휘(戴指揮)와 태창위(太倉衛)의 서지휘(徐指揮) 두 사람을 사형에 처했다. 이에 다시 어지휘(於指揮)를 보내 그들을 체포하게 했는데, 체포한 왜구 가운데 젊은 왜인의 입을 찢고 [[내가 고자라니|불알을 깠더니]] 마침내 바닷가가 평온하게 되었다." > >"듣자하니 왜적들이 2백리 ~ 3백리를 횡행하며 그대 나라를 노략질해도 그대들은 아예 관심이 없는지 파괴되어 제대로 기능을 하지 못하는 성곽도 보수하지 않고 성의 해자(垓字)도 고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우리를 의심만 하니 이는 무엇 때문인가?" >---- >'''《고려사》 공민왕 22년''' 내용을 보자면 '''우리들은 왜구 발랐는데 너희들은 뭐하고 있냐''' 는 이야기다. ~~출신답게 말에서 패기가 넘친다.~~ 그러나 사실 명사 일본전을 보면 홍무제의 서신과 달리 이 무렵에 명도 고려처럼 왜구에 골치를 앓고 있었다. 다만 1380년대 초반에 장군 탕화(湯和)가 해안 지역을 방비하고 6만에 가까운 병력과 300여척의 함선으로 방비하여 왜구를 막기는 했다. 7월에는 왜구가 교동을 공격했으며, 8월에는 해주(海州)를 침입해 '''목사 엄익겸(嚴益謙)을 살해했다.''' 또 서해도 만호(萬戶) 허자린(許子麟)이 왜구를 막아내지 못하자 감찰관인 체복사(體覆使)로 임명된 삼사좌윤(三司左尹) 정단봉(鄭丹鳳)을 보내 벌을 주게 했는데, 이 정단봉이라는 작자가 순전히 자신의 개인적인 원한으로 허자린을 목 졸라 죽이고, 허자린의 동생이 억울함을 표하자 정단봉이 달아나는 막장극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 이후에도 왜구를 막지 못한 벌로 이성림, 지심(池深) 등이 참형에 처해지고 도흥(都興) 등이 파직되기도 했다. 한편 고려 내에서는 이 무렵부터 왜구를 막으려면 화약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당시 고려는 아직 화약을 자체 생산 하지 못했으므로 명나라 중서성(中書省)에 "화약 좀 쓰게 해주세요."라며 화약 지원을 요청하기도 했다. >"왜적이 소란을 일으키며 출몰한 것이 벌써 20년이 넘었습니다. 그 동안 본국 연해 주군의 요해처에는 군사를 배치해 방어만 하게 했을 뿐 바다까지 나가 추격해 체포하라는 지시는 내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최근 들어 적들이 너무 기세등등한지라 이제는 바다에 나가 추격 체포하게 함으로써 백성들의 근심을 근절하기 위해 관원을 파견해 왜적을 체포할 함선을 건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함선에서 사용할 병기·화약·유황·염소(焰焇) 등 물품을 조달할 길이 없어 의논한 끝에 상국 조정에 부탁하게 되었으니 상기 물품들을 보내 주셔서 왜적을 격퇴할 수 있게 해 주시기 바랍니다." >---- >'''《고려사》 공민왕 22년'''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